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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아씨씨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오상 기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먼저 오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1270년에서 1291년 사이에 교황의 칙서 9개가 그의 상처는 진정한 성흔임을 보증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아시시에서 출생하였다. 어릴때는 특별한 재능이나 뛰어난 카리스마가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젊을 때 군 생활을 하다가 아시시로 다시 돌아온 그는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고는 홀로 옴브리아 평원에 있는 경당을 순례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1205년 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벽에서 더 아래쪽에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십자가상 앞에 꿇어앉아 있던 그는 주님의 집을 준비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상당과 인근의 다른 성당들을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에 따른 스트레스, 환각 등 병리학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는 이미 성 다미아노 성당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성당이폐허가 된 모습을 보았거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떤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어떤 문헌에서도 프란치스코가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일으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프란치스코가 들ㅇ느 메시지의 내용은 짧고, 정확하고, 직접적이다. 이 메시지에는 어떤 예언이나 종말론, 천년 왕국설도 없다. 말씀은 프란치스코를 세상에서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선을 베풀기를 잘하는 그의 모습이 더 뚜렷이 드러나도록 그의 존재, 이성, 감수성, 의지, 신앙을 움직이도록 했다. 

 

 

프란치스코는 많이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회 설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봄이 되자 그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찬가>를 지었다. 이 시는 중세 시대에 이탈리아어로 적힌 첫 번째 작품이며,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온 세상이 화해하기를 기원하는 프란치스코의 심오한 신학적 사상이 담겨져 있다.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에게 자신을 포르지운콜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1226년 10월 3일 혹은 4일 밤에 프란치스코는 동료 형제들을 축복한 다음 땅바닥에 그대로 누운 채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겼다. 

 

1230년 5월 25일에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이 대성당으로 옮겼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수많은 치유가 일어났다. 

1979년 9월 29일에 요한 바오로 2세 쇼황은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의 수호성인과 자연의 보호자로 선포하였다 .